여 행 정 보

러시아 예술과 문화

2019-07-19

러시아 문화 - 글. 미술사학자 안현배-

* 7월 26일~7월 31일 민트투어 러시아 문화 탐방 일정 관련 러시아 문화 설명입니다.

  • 1. 미지의 여인의 초상화 (Portrait of an Unknown Woman)

    미지의 여인의 초상화 (Portrait of an Unknown Woman) 
    이반 크람스코이 (Ivan Kramskoi) 
    1883년 작 75.5 x 99 Cm 트레치아코프 미술관

    첫 번째로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는 그림은 제목이 살짝 그림이 주는 인상의 강함에 못 미치는 듯 보이는 '미지의 여인의 초상화'라는 작품입니다.

    작가 이반 크람스코이라는 19세기 러시아 화가로서 화가들 사이에서도 많은 존경을 받았던, 단순히 예술가로써 뿐 아니라 지식인의 대표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유럽에 비해 많은 점이 아직 발전하지 못했던 간격의 차이는 시대를 비판하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있는 많은 인재를 필요하도록 했죠. 러시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 중에 하나가 항상 유럽을 닮고 싶어하는 점과 스스로의 것을 찾아서 인정받으려는 점 두 가지가 묘하게 동시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유럽을 맹종하다시피 하고, 또 어떤 때는 유럽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들의 방식을 고수하기도 하죠. 그것이 매번 겹쳐서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이반 크람스코이는 유럽식 최신 회화를 연구하고 실행하는 동시에 러시아를 주제로 하는 그림을 그리는 데 애썼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그림은 그런 그의 작업 중에서도 유명한 작품이죠.

    많은 미술사가들은 초상화를 그려주다가 크람스코이와 친해진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이 그림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서 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쓰게 된 소설이 안나 카레리나 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실재로 크람스코이가 한 번도 이 여성이 누구를 그린것인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이야기만 무성했습니다. 어떻든 소문이 넘치고, 안나 카레리나의 주인공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이 그림이 사람들에게 주는 깊은 인상은 화제거리였습니다.

    약간 멸시하는 듯, 도도하게 내려다 보는 여성은 그 눈빛으로 이미 존재감이 확실합니다. 안나로 삼을만큼 우리가 이 여성에 빠질 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눈빛과 마주하고 이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만드는 일.

  • 2. 러시아의 역사

    구약 성 삼위일체 (The Old Testament Trinity) 
    안드레이 루블레프 (Andrei Rublev) 
    1410년경 작 142 x 114 Cm 트레치아코프 미술관

    우리나라에 조선이 세워질 무렵 러시아는 오랫동안의 고통을 이겨내고 새로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거리감이 있던 것을 생각하면 신기하게도 두 나라의 역사적인 시련의 원인은 같았죠. 몽고 입니다. 몽골 제국이 아시아와 유럽을 통일해버리기 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땅에 키에프 공국이라는 나라로써 초기 국가 단계의 발전 과정을 (그마저도 좀 느리지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좀 이색적이지만, 왕이 국가가 앞으로 가져야 할 종교를 선택하게 되었죠.

    크리스트교의 한 흐름인 정교회가 러시아의 종교로 되었던 것이 이 시점입니다. 그런데 국가 체제가 정비가 되고 키에프 공국이 발전하던 그 시점에 역사상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가공할 군사력으로 유럽까지 휩쓸어 버린 몽골이 나타나 모든 것을 파괴해버렸습니다.

    멸망한 키에프 공국의 유민들과 러시아 북부에 살던 정착민이 합쳐서 몽골의 침략을 피해 모스크바 인근의 숲 속에서 몽골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고 있던 그 시간 동안 정교회는 러시아 정교회가 되고, 당연히 다소 폐쇄적이 됩니다.

    상존하는 외래 민족의 호전성, 수비가 갖춰지지 않은 자신들의 취약성, 그리고 살아가기 척박한 환경 등등은 그들이 종교를 대하는 것에 절실함을 더하게 했고, 교류가 막힌 폐쇄적인 구조는 강한 신비주의 흐름으로 가도 막을 방법이 없게 했습니다.

    지금 와서도 항상 언급되는 러시아 정교회의 정신적인 면, 혹은 역사에 나타나는 부정적인 면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3.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에르미타주

    상트페테르부르크 전경

     

    에르미타주 항공 사진

    수도 모스크바와 함께 러시아에서 가장 주요한 도시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입니다. 이 곳은 러시아 역사의 전설적인 차르 표트르 대제의 명령으로 세워진, 유럽과 상당히 거리가 가까운 자리의 도시이죠. 1701년 황제가 이곳에 지으라 명령했던 것 역시 유럽과 지리적으로 뿐 아니라 심리적으로 가까운 곳이라는 것이 이 결정의 핵심입니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 목표가 항상 충돌을 합니다. 서구화와 슬라브 중심주의 라고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서구화란 말 그대로 러시아 전통 문화보다 서양 유럽의 발달된 문명을 이식해서 새로운 국가와 문화를 만들겠다는 것이고, 굳이 슬라브 중심주의는 러시아 주류 민족인 슬라브 족이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지키겠다는 입장을 의미합니다.

    표트르 대제는 어린 시절 부터 유럽 문명을 동경해서 어린 시절 유럽에서 공부를 해 오거나 유럽의 전문가들을 초대해서 새로운 문물을 배우는데 적극적인 통치자였습니다. 이전까지 상당히 동양적인 분위기의 왕실이나 귀족사회는 표트르 대제에게 반발도 못해보고 러시아식 단발령을 당하고 (수염을 다 면도하고 오라고 했는데 이게 사회 통념상 문제) 복식도 서양식으로 전면 교체 되기에 이르죠.

    이 과정에서 모스크바를 버리고 새로운 도시로 이주 (도시 옮기기는 통치자들의 꿈 같은 느낌이) 하는 목적으로 유럽화 된 새 도시가 생긴 겁니다. 바닷가에 늪지인데도 세워진 이 도시는 곧 러시아 최대의 도시가 됩니다. 그리고 서구 문명과 러시아 적인 것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곳이기도 합니다.

    에르미타주 야경

     

    에르미타주 실내 모습

    세계 몇 대 오케스트라, 오페라, 박물관 이런 개념이 이젠 시대에 뒤떨어진 유치한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쉽고 편한 정리 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루브르와 영국 박물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뒤를 잇는 유럽 문화 유산의 4대 박물관이라고 한다면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쥬를 포함시키게 됩니다. 사실 백과사전에 소개되어 있는 250만점의 작품이 있다는 이야기 같은 것은 그렇게 와 닿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들의 목록들을 확인하게 되면 갑자기 여기는 꼭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죠.

    원래 우리들이 접할 수 있는 서양 미술사 책들의 대부분은 저자의 주변 환경과 관계가 많습니다. 보통은 자신이 쉽게 접하고 방문할 수 잇는 곳의 작품을 중심으로 글을 쓰게 된다는 이야기. 프랑스, 이탈리아 작품이 주로 내용 전개에 사용되고, 소장 하고 있는 곳 역시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런던과 뉴욕 등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 입니다.

    따라서 에르미타쥬 같은 곳은 A 급 작가의 A- 급 (순수하게 유명세로만 따져서) 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있는 방문이 될 것입니다.

    에르미타쥬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황제의 궁인 겨울궁의 한 켠을 이야기 합니다. 겨울궁 자체가 프랑스 바로크를 러시아 식으로 해석해서 만든 것 답게 에르미타쥬라는 이름 역시 프랑스 어로 외진 곳, 은밀한 곳을 이야기 하는 황제가 혼자서 자신의 컬렉션을 모아놓은 장소라는 데서 그 명칭이 유래합니다. 초기에 표트르 대제가 이 곳을 박물관으로 설치했을 당시에는 표트르 대제의 이상한 취향 덕분에 기괴한 동물이나 괴물의 박제 (대체로 조작되었지만, 믿고 사온 것) 아니면 고문 도구나 그로테스크한 예술작품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764년 독일 출신의 왕비였으나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른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 부터 서구 컬렉션 확대에 총력을 기울여 지금 같은 모습이 나온 것이죠. 소장품 부터 이 에르미타쥬 궁의 건설에까지 러시아 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할 만한 규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 4. 앙리 마티스의 붉은 식탁

    붉은 식탁 (Harmony in Red)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908년 작 180 x 220 Cm 에르미타주 미술관

    보통 이 그림은 붉은 방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만 정확한 제목은 붉은색의 식탁 입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거장 마티스의 초기 대표작이기도 하고, 항상 야수파라는 회화 운동을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 이미지 입니다.

    언뜻 그림을 보게 되면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식탁위에 문양과 벽의 문양이 같은데, 색깔까지 같이 붉은색과 보라색을 공통으로 쓰는데다 원근감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어디가 벽이고 어디가 식탁인지 구분이 가지 않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죠.

    그림을 설명하는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우리들의 눈이 항상 사물을 사실적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기초로 본떠서 그려낸 것을 미술이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덕분에 그런 일이 생겼다고 이야기 합니다. 마티스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눈에 보이는 세계의 재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의 목표는 붉은 색과 다른 색들 사이의 조화, 선명한 색감의 전달 이런 것이었습니다. 잘 보면 식탁과 벽 사이에 아주 얇은 선이 그려져 구분을 해내고 있습니다만, 말씀드렸다시피 이 그림의 목표는 붉은색이 전해주는 풍성한 에너지 입니다.

  • 5. 바실리 폴레노프-모스크바의 안뜰

    굉장히 기계적인 분류지만,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쥬를 중심으로한 미술관에서 느끼는 감상이 좀 더 개방된 서구화라고 한다면, 반대로 모스크바에 미술관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은 보다 더 러시아 적이고 보다 더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담으려는 예술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런 흐름에 대표적인 작가 집단으로.

    이동파- 라는 유파가 특히 중요합니다. 러시아는 근대화가 다른 유럽에 비해서 굉장히 느렸고, 그것도 자주 집권층에게 막혀 있었습니다. 때때로 있는 개혁운동은 그래서 항상 고난이 많이 뒤따랐죠. 예술에서도 이런 흐름이 겨우 등장을 합니다. 지난 번 소개해드린 미지의 여인의 작가 크람스코이와 후배 13명 들이 1872년 함께 했던 이동파는 이름이 좀 특이해서 기억이 남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살짝 착각이 들 수도 있는데, 러시아적인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개혁파인 점이죠. 아카데믹한 교육, 그리고 기존의 시스템은 서구 유럽을 쫓아가자는 쪽이었고, 여기에 대항해서 러시아 본연의 아름다움을 찾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이동파 라고 합니다. 이 특이한 명칭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순회 전시회를 개최한 것에서 이동파라는 이름으로 유래가 됩니다. (이동하면서 전시회를 했다는 뜻)

    오늘은 그 작가 들 중에서 바실리 폴레노프 라는 사람을 소개해드립니다. (바실리 폴레노프)

    모스크바의 안뜰 (Moscow Backyard) 
    바실리 폴레노프 (Vasily Polenov) 
    1878년 작 80.1 x 64.5 Cm 에르미타주 미술관

    모스크바의 안뜰 이라는 이 그림은 러시아의 여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878년 작품이고, 트레차코프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입니다. 러시아 답지 않은 하늘? 이라고 볼 만한 맑은 하늘과 따뜻한 분위기 그리고 풀밭의 아이들에게 눈이 많이 가는 정감 있는 작품입니다.

    아카데믹한 기존 회화에서는 이렇게 러시아의 풍경을 묘사하는 일이 없었기에 이 그림이 가치 있게 평가되는 것이랍니다.

  • 6. 바실리 폴레노프-모스크바의 안뜰

    어린시절 할머니가 텔레비젼으로 사극을 틀어놓으시면 지루해지고 그 말투도 별로 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끔 암행어사 같은 사극에 폭포 목욕신 이런 게 나오면 갑자기 없던 흥미가 생겼었다는 사실은 비밀) 그러면서 궁금해졌었죠. 왜 어른들은 사극을 좋아하시는 걸까. 지금도 그 궁금증은 여전합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해드리는 그림은 역사화 입니다. 러시아는 유난히 역사화 들에서 굉장히 자극적인 요소와 드라마같은 장치가 꼭 등장을 합니다. 미술사학자들은 그런 이유로 러시아 그림이 좀 신파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약간은 수준이 낮은 게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사람 사는 곳에 어디건 드라마가 없겠습니까.

    예술의 인간적인 면을 생각하게 되면 러시아 미술처럼 우리에게 절실하고 처절한 것도 없다는 생각은 그때문에 드는 겁니다.

    지난 시간 소개해드렸던 이동파 가운데 가장 활약이 뛰어났던 사람은 일리야 레핀이라는 작가 입니다. 이 사람의 중요성은 러시아 예술사에서 압도적입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국립 미술대학의 별명이 레핀스키 - 즉 레핀의 후예들 이라고 하는데 그 이상의 의미가 담긴 명예)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Ivan the Terrible and His Son Ivan) 
    일리야 레핀 (Ilya Repin) 
    1885년 작 250 x 200 Cm 트레치아코프 미술관

    그리고 오늘 그의 작품 중 유달리 깊은 인상을 받게 되는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이라는 그림을 소개해드립니다.

    지금의 우크라이나에 위치한 초기 키에프 공국이 몽골 군대의 영향으로 멸망한 후 한동안 러시아 땅의 주인은 몽골인들이었습니다. 이후 러시아가 다시 국력을 회복하고 영토를 넓혀 나갈 때, 러시아의 황제로서 처음으로 '차르'라고 불렸던 사람이 이반 4세, 즉 이반 뇌제 였습니다.

    천둥의 황제라는 뜻의 뇌제는, 그의 행적이 워낙 잔인하고 극악무도해서 공포의 대명사 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림은 그런 악행 중에서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지금 섬뜩한 눈빛으로 절망한 표정을 짓는 노인이 이반 뇌제, 그리고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남자가 그의 아들 이반 입니다. (이름이 같습니다) 차르 즉위 시절 내내 황제 권한의 강화와 중앙 집권에 최선을 다했고, 반대가 되는 사람은 친동생부터 친구까지 가리지 않고 죽이고 유래 없는 대학살도 아무 이유 없이 자행했던 탓에 러시아 인들에게 공포로 불리던 이반 뇌제는 말년이 되자 종종 발작과 광기가 폭발하게 됩니다.

    역사에는 며느리가 입은 옷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임신한 황태자비를 폭행해 유산을 하게 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러 온 본인의 아들 이반을 곤봉으로 때려 죽였다는 사실이 전해집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이 그 장면. 이반 뇌제의 눈빛을 보면, 권력의 잔인한 속성과 인간 바닥의 폭력성과 광기, 그러면서도 뼈아픈 후회 같은 것들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그림을 보면서 신파조 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죠. 하지만 직접 마주한 순간엔 감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이 그림 속의 눈빛은 우리에게 비극과 절망의 깊이를 전해주는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스크바 트레챠코프에 있습니다.

  • 7. 일리야 레핀

    너무 섬뜻하고 강한 이미지의 그림만 보여드리는 것 같아서 일리야 레핀의 다른 그림도 보여드립니다. 아마도 레핀 작품으로서 보다는 그냥 자주 본 적이 있는 그림이실 겁니다. 일리야 레핀은 활동시기에 거의 모든 러시아 예술가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살았기 때문에, 종종 예술가들의 초상화를 편안하게 그릴 수 있었습니다.

    톨스토이를 특히 좋아했고, 음악가 무소르그스키가 사망하기 며칠 전 그림을 완성해서 줬던 것은 유명합니다. 두 사람의 초상화도 오늘 보너스로 보내드립니다.

    톨스토이 초상화 (Portrait of Lev Nikolayevich Tolstoy) 
    일리야 레핀 (Ilya Repin) 
    1887년 작 124 x 88 Cm 트레치아코프 미술관

     

    무소르그스키 초상화 (Portrait of the Composer Modest Petrovich Mussorgsky) 
    일리야 레핀 (Ilya Repin) 
    1881년 작 69 x 57 Cm 트레치아코프 미술관

  • 8. 일리야 레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No One Waited for Him) 
    일리야 레핀 (Ilya Repin) 
    1884-1888년 작 160.5 x 167.5 Cm 트레치아코프 미술관

     

    고해 성사를 거부하는 사형수 (Refusal Of The Confession) 
    일리야 레핀 (Ilya Repin) 
    1879-1885년 작 758 x 48 Cm 트레치아코프 미술관

    어느 선동가의 체포 (Putting A Propagandist Under Arrest) 
    일리야 레핀 (Ilya Repin) 
    1880-1892년 작 55 x 35 Cm 트레치아코프 미술관

    일리야 레핀의 그림을 한 부분만 소개해드리니 뭔가 좀 아쉬워서 유명한 시리즈로 묶어서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라는 제목의 그림과 "고해 성사를 거부하는 사형수", "어느 선동가의 체포" 이렇게 3개 입니다.

    아직 러시아 혁명이 있기 전, 러시아라는 나라는 유럽의 기준으로 볼 때 (그들이 유럽에 속하려고 애를 쓰고 있으니) 정치 문화 적으로 정말 후진국에 속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 국민들의 '개화'와 교육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죠. 이 때문에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힘을 줘야 한다는 '위로 부터의 개혁 운동' (대표적으로는 민중속으로! 라고 주장하는 브 나로드 운동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 초기에 많은 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크게 실패를 하죠.

    시도하는 쪽도, 그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쪽도 둘 다 부족한 경험 탓에 이 운동들은 실행했던 젊은 혁명가 내지, 교육가들의 피만 희생당하고 끝이 나게 됩니다.

    일리에 레핀의 그림은 그런 상황과 그 속에서 생기는 긴장감. 그리고 이런 노력이 후에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상황 같은 것을 굉장히 극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묘사합니다.

    제목 속에서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는 오랜 기간 가정에서 떠나 있었던 가장의 귀환에 반가우면서도 어려운 분위기가 되는 가정을 통해, 그리고 최후의 고백성사도 거절하는 사형수 혁명가를 통해 권력과 맞서려고 했던 그들의 피를. 그리고 어느 선동가의 체포 역시도 등장인물의 눈빛과 표정에서 정말 많은 것이 전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 9. 렘브란트

    에르미타쥬가 가지고 있는 렘브란트

    렘브란트는 한국에서 유난히 인기 있는 화가 중에 한 명입니다. 아마도 빈센트 반 고흐, 그리고 클로드 모네와 함께 가장 사랑받는 화가 군에 넣어도 될 듯한.. (피카소와 다빈치는 유명세라고 한다지만)

    렘브란트가 사랑을 받는 이유는 그런데 뭘까요? 친숙하게 크리스트교 안에서 성경, 교리 공부 등에 사용하는 이미지들이 일단 렘브란트가 많고 (그래서 친숙하고) 배경 지식이나 화려한 표현이 없이 엄숙하고 정돈된 분위기의 그림이 '시끄럽지' 않아서 일 수도 있습니다.

    유럽 본토 내에서도 렘브란트는 대가로 존경받는데 그 이유는 살짝 달라서 그가 묘사한 인간에 대한 깊이와 삶의 높낮이를 보여주고 그 감정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표현 등이 사랑 받기 때문입니다.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쥬는 이 렘브란트의 작품 중 특히 유명한 그림이 2개 있습니다.

    다비드와 조나단 ( David and Jonathan) 
    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Harmensz van Rijn Rembrandt) 
    1642년 작 73 x 61.5 Cm 에르미타주 미술관

    그 중 하나는 다비드와 조나단. 렘브란트(1606년~1669년)가 1642년에 그린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러시아 문화를 좀 더 서구화 시키고, 산적한 문제의 대답이 오로지 유럽을 따라잡는 것이라고 믿은 표트르 대제 시절, 그가 직접 네덜란드에서 구입해서 가지고 온, 말하자면 첫 번째 소장품이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비드와 조나단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죠. 다비드는 그 골리앗을 죽인 소년 영웅 출신이고, 조나단은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던 사울의 아들, 그러니까 왕자였습니다. 둘은 젊어서 만나 서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의 장면은 다비드의 인기가 올라가는 것을 시기해서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아버지 사울의 마음을 알고, 조나단이 다비드에게 도망가라고 충고하고 나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이별을 하며 서로 슬퍼하는 장면입니다.

    둘 다 비싸보이는 옷을 입고 있는데, 다비드는 슬픔을 감추지 못하지만, 그래도 몇 살 더 든 것으로 전해지는 조나단은 떠나는 친구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둘 사이에 나이 차이가 너무 있어서 마치 아버지와 아들의 이별 장면 같긴 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이 그림을 모범으로 표트르 1세는 이제까지 유럽 본토의 예술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던 점을 지적하고 미술가들이 분발하도록 요구했습니다.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Harmensz van Rijn Rembrandt) 
    1668-1669년 작 264.2 x 205.1 Cm 에르미타주 미술관

    두 번째 그림은 우리에게도 정말 친숙하게 '돌아온 탕자'라고 알려진 그림입니다. 가끔 어떤 미술관 앞에서 '나는 그것만 봐도 돼' 라고 목적을 적시하거나 소박한 욕심을 말하는 분들이 계신데, 에르미타쥬에서 나는 이것만 봐도 된다는 이야기를 저도 여러 번 들었습니다.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황금시대, 가장 경제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발달했던 시기에 살았고, 네덜란드가 쇠퇴하는 것과 비슷하게 본인의 인생도 내리막길을 겪으며 숫한 고생을 한 사람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떠나 자기 마음대로 재물을 낭비하면서 동시에 삶을 낭비했던 아들이 집으로 돌아와 잘못을 비는 장면은 오랫동안 자주 써질만큼 어느 시대에나 교육적인 스토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렘브란트 생의 마지막에 그려진 이 그림은 작가 자신의 삶이 담겨 있다고 보입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처가와의 갈등으로 파산을 하고 아내와 사이의 자식들 모두를 병으로 잃는 등 그의 후반 생애는 말 그대로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마지막 남았던 결혼까지 시켜보낸 아들이 병으로 사망을 했을 때 그가 느꼈던 절망감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아들을 품에 안은 아버지는 제발 아들이 살아 있기를 바랐던, 내내 기다리던 자식을 품에 안아 안도하는 모습이고, 우리 모두의 모습을 담은 아들은 떨어진 신발과 기대어 우는 어두운 얼굴로 우리 스스로를 반성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주제지만, 종교의 내용보다는 주변의 인물과 환경들이 렘브란트의 시대를 담고 있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적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그런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10.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혹은 그때는 틀리지만 지금은 맞는 것들

    요즘 한참 스캔들로 유명해진 감독의 영화 제목에서도 있지만, 가끔 역사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혹은 그때는 틀리지만 지금은 맞는 것들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상트 페체르부르크의 미술관들이 유럽 지향의 개념 속에 정리되어 있는 반면 모스크바의 미술관들이 러시아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거친 비교를 한 번 해드린 적이 있었는데, 오늘도 상트 페체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쥬 미술관 작품들을 설명 드리려 하다가 문득 든 생각입니다.

    원래 서구 유럽이 중세의 경직성을 탈피하고 나오게 된 계기가 르네상스 때 부터 입니다. 에르미타쥬는 그 르네상스의 거장인 다빈치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죠. 르네상스 시대 유명한 작가들의 활약으로 유럽은 인간의 신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연의 이치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게 어떤 것인지 등등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대략 150 년 정도의 전성기를 가졌던 르네상스는 이후에 다소 과장되고 지나치게 화려해서 특정한 계층의 취향이라고 평가받는 바로크를 거치면서 뭔가 방향을 잃은 듯 보였었습니다.

    르네상스가 '재생' 이라는 뜻인 것은 그 운동이 중세 이전의 찬란한 고전 시대를 되살린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와 로마 시절 신화와 전설을 묘사했던 조각과 각종 도자기들이 르네상스 시절에는 모범이 되었었는데, 뒤에 오는 시대들도 항상 서구 유럽은 방향을 잃을 때 마다 되찾아 오고 돌아보는 자신들의 정신세계에 원천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때만 되면 다시 들춰보고 자세가 흐트러졌다고 생각되면 다시 지향해야 하는 목표라는 겁니다.

    그때는 맞지만 지금은 틀리다는 것은 오늘 소개해드리는 몇 개의 그림에서 금방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사포와 파온 (Sappho and Phaon) 
    자크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1809년 작 225 x 262 Cm 에르미타주 미술관

    첫 번째 그림은 프랑스의 신 고전주의 예술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입니다."사포와 파온" 1809년 에 그려진 작품이죠.

    사포는 고대 그리스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여류시인, 그녀는 원래 동성애자로도 유명했었는데, 그녀가 살던 섬 레즈보스가 나중에 레즈비언의 어원이 되었던 것도 그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선 파온이라는 남성을 좋아하는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지죠. 이 그림은 젊은 남녀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그리스 원전을 현대화(그 당시 기준으로)시킨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그리고 나폴레옹 시대에 승승장구 했던 다비드 라는 화가는(나폴레옹 대관식으로 유명합니다) 이처럼 혁명 이전 귀족 문화 덕분에 병들어 있던 예술을 새롭게 되살리겠다는 의지로 신고전주의 를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다비드가 워낙 정치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어서 그 영향이 특히 컸다고 하겠습니다.

    그림 자체는, 에로스가 등장해서 사랑 이야기를 알려주는 것 말고 잔잔하고 조용해서 별로 다비드 스러운 부분이 없습니다만. 이 그림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후에 몇 개의 그림 때문입니다

    굴 속의 막달라 마리아 (Mary Magdalene in a Grotto) 
    쥘 르페브르 (La jeune rieuse) 
    1876년 작 71.5 x 113.4 Cm 에르미타주 미술관

     

    노예 매매 (Slave Market) 
    장 레옹 제롬(Jean Leon Gerome) 
    1866년 작 63.5 x 84.8 Cm 클라크 미술관

    쥘 르페브르의 "동굴 속의 막달라 마리아" 1876 년 작품, 장 레옹 제롬의 "노예 매매" (1884년)같은 작품 들은 이 신고전주의의 전통을 정말로 빈틈없이 따르고 있지만, 그래서 정말 완벽하게 아름다운 여성 누드들을 보여주지만, 다비드 이후에 80년이 지날때 까지 이 모습을 그냥 유지했다는 이유로 좋지 못한 평가를 오랫동안 받았습니다. 이 그림이 있었을 시기가 이미 인상주의 등 모더니즘 흐름이 본격화 되었었기 때문에 유행 지난 그림이라서 이젠 사람들이 찾지도 않고 관심도 없어졌죠.

    워낙 프랑스 라는 플러스 요소가 있어 러시아에서 대접해줘서 그렇지, 이 작가들의 그림은 한 때 서유럽 박물관에서는 무시되고 버려지기도 했었습니다. 요즘에는 다시 모든 것들이 복고적인 풍으로 돌아가면서 재평가를 받고 있긴 하자만, 그렇기 때문은 답은 항상 변하는 것이라는 평범한 사실이 더 와 닿는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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